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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덕 노무현 탄핵 고향 경력 이력 해병대 군대 프로필

날리호 2020. 6. 18. 15:11

- 홍사덕 프로필 이력 경력 누구?

출생/나이 - 1943년 3월 5일
고향/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
사망일 - 2020년 6월 17일 (77세

 

경력 - 중앙일보 기자
한국기자협회부회장
제24대 정무제1장관
제16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원내총무
박근혜후보 공동 선거대책위원장
18대총선 친박연대 공동선대위원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군복무 - 해병대 군필(해병 병장 만기 전역)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11·12·14·15·16·18


 

- 출신 학교
1955년 영주초등학교 졸업
1958년 영주중학교 졸업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졸업
1961년 ~ 1968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 학창시절
1955년 영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영주중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하여 1968년 서울대학교 졸업했답니다.

 

 

1968년 졸업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중앙일보 기자,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을 지냈답니다. 그 뒤 신민당 대변인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민당 대변인 시절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즉석 논평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방송에도 출연하여 방송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답니다.

- 군대 병역

대학교 외교학과에 재학중이던 지난 1962년 해병대에 자원 입대(130기)해 2년간 사병(의장대원)으로 복무했으며, 서울대 출신으로는 첫 해병대 사병으로 홍 의원의 아들도 해병대 702기 출신이랍니다.

 

 

- 정치 입문
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민한당 국회의원이 되었답니다. 80년대 중반 소위 ‘이민우 구상’으로 신민당을 망하게 했다는 의견도 있답니다. 그 뒤 신민당 대변인, 민주당 부총재, 민주당 대변인 등을 지냈답니다.

 

 

- 5공, 6공화국 시절
1985년 12대 총선 이후 사실상의 관제 야당이었던 민한당을 흡수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100여석의 거대야당으로 탈바꿈하여 직선제개헌을 모토로 내걸고 제5공화국에 대한 선명투쟁을 선언하였답니다.

당시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가 정치규제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신민당의 총재는 이민우가 맡고 있었지만, 실권은 거의 없었다. 홍사덕은 이런 이민우 총재 밑에서 당대변인을 맡아 소장파 재선 의원이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답니다.

 

 

1986년 민정당의 내각제와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안이 합의점을 못찾아 정국은 교착상태에 빠졌답니다. 그러자 신민당 총재인 이민우는 "민주화조치가 선행되면 내각제도 수용할 수 있다"는 소위 이민우 구상을 들고 나왔답니다. 이는 사실상 홍사덕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내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양김씨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답니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곧 진정되었으나 이민우, 이철승과 같은 대여타협파와 양김씨가 주도한 선명투쟁파간의 알력은 심화되어 당내 내분은 증폭되었답니다. 결국 1986년 양김씨는 더이상 신민당내의 대여 타협론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소속 의원들을 탈당시켜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답니다

 

 

1988년 13대 대선 이후에는 반(反) 양김 노선을 주장했다가 14대 대선을 앞두고는 민주당에 입당하여 김대중 후보 진영의 대변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답니다.

 

직선제 개헌 이후 양김이 분열하자, 홍사덕은 무소속의원으로 있다가 13대 총선에서 서울 강남구 을에 출마해 이태섭에게 패하고 원외로 밀려났답니다.

 

 

그러던 중 1990년 삼당합당을 거부한 이기택이 주도하는 민주당(소위 꼬마민주당)에 노무현, 박찬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고, 1991년 민주당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합류하여 제14대 국회의원(서울 강남을)에서 당선되었답니다

 

한편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쯤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답니다.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답니다.

-  1990년대 이후
그러나 1995년 지방선거 이후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통합민주당에서 소속의원들을 탈당시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홍사덕은 이에 반발하여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남았답니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강남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답니다.

 

 

1997년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문민정부의 마지막 정무장관으로 입각하기도 했으나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에 입당하지는 않았으며,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2000년 초까지 무소속으로 의정활동을 하였답니다. 1999년 운석 장면 기념회 감사를 지냈답니다.

 

- 한나라당 입당 이후
2000년 1월 19일 장기표와 함께 '1인 보스정치와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가칭 ‘무지개연합’ 창당을 선언하였으나, 8일 만에 무지개연합이 해체되며 이때 무지개연합을 망하게 했다는 말이 있답니다. 1월 27일 돌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답니다. 이를 놓고 그가 주장해온 1인 보스정치 청산의 종착역이 한나라당이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답니다.

 

 

입당 직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와 함께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한나라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고,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2000년 6월 5일 국회 부의장이 되었답니다.

2004년 한나라당 원내총무로서 민주당 유용태 원내총무와 함께 노무현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답니다.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에게 근소한 표차로 패배하였답니다.

 

 

2005년 경기도 광주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한나라당이 탄핵의 역풍이 가라앉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진섭을 전략공천하자, 이에 불복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답니다.

 

2007년 안병훈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와 함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답니다. 하지만 여전히 탈당한 상태라 선거 운동 당시 그 자격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답니다.

 

 

7월에 복당 신청을 하였으나 이명박 후보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답니다. 2007년 7월 30일 대통령 후보자 이명박은 반드시 진다는 이명박 필패론을 말했다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측 박형준 대변인에게 망당(亡黨)전문가 홍사덕, 정권 교체를 또 가로막나는 말을 들었답니다.

 

2008년 3월, '친박연대'의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고,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의 텃밭인 대구 서구에 출마하자, 한나라당과 진보신당 대구지부로부터 정치도의를 모른다, 철새다 등의 맹비난을 받았답니다.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종현 후보를 6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누르고 당선되었답니다.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답니다.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ㄷ바니다. 2012년 10월 29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던 바가 있답니다.